나는 사이버 국가 ‘비트네이션’ 국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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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성 한겨레 기자
권오성 한겨레 기자 2018년 3월14일 11:20

이름·주소·이메일로 국적 취득
비트코인으로 먹고사는 일 해결
국가서비스 더 효과적으로 제공
구성원끼리 문제 논의·해결 ‘협치’
정보 분산 저장돼 사이버 침공 불가


 

참여자의 선택에 따라 공해상에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스테딩’의 해상국가 가상도. 시스테딩 누리집 갈무리. Gabriel Sheare, Luke & Lourdes Crowley, and Patrick White


 

나는 지난달 새 국적을 취득했다. 박근혜 정부의 몹쓸 정치를 보면서 ‘이게 나라냐’라는 국민의 분노를 공유하던 와중이었다. 그렇다고 이민을 떠나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30여년 살아온 대한민국의 터전을 순간에 날릴 형편은 못됐다. 국적 취득은 안방에서 이뤄졌다. 사이버 세상의 외도다. 나는 지난달 가상국가 ‘비트네이션’(Bitnation)의 국민이 되었다.


입국은 허무하리만치 쉬웠다. 필요한 건 이름과 주소, 전자우편뿐이었다. 검증이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적어 내도 상관은 없다. 쉽다는 생각은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정보가 어마어마한 전통의 가입 방식에 내가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주민등록번호라는 13자리 번호표를 붙이고 법적 상태, 학력, 재산, 경력 등 각종 기록을 직간접적으로 채우도록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전통 국가에서 국민은 보살피거나 관리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통계·분석을 위한 ‘딱지 매기기’가 필요하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가인 비트네이션은 그럴 필요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파도는 기술과 경제의 해안에만 몰아치는 건 아니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은 그의 책 <4차 산업혁명>에서 “이 모든 상황은 정치, 경제, 사회 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인 변화다. 이는 세계화 과정 자체가 역행한다 해도 되돌리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포럼은 이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비트네이션’을 들고 있다. 비트네이션 탐험기를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고 분산되고 공유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정신이 통치 방식(거버넌스)에 미치는 영향을 짚었다.


 



 

비트네이션은 2014년 설립된 최초의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가상국가다. 가상국가라는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2000년대 중반 큰 인기를 끈 ‘세컨드 라이프’를 비롯해 여러 사례가 있었다. 세컨드 라이프는 온라인게임처럼 3차원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를 만들어 ‘제2의 인생’을 살아보는 서비스로, 한때 가입자가 2000만명에 육박하고 굴지 기업들이 사이버 지사를 차릴 정도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산한 곳이 되어 버렸다.


비트네이션이 세컨드 라이프류와 다르다고 평가받는 결정적 이유는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을 뒀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의 분산형 구조는 무궁무진한 응용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블록체인을 인터넷에 비견되는 기술로 꼽기도 한다. 비트네이션은 이를 국가에 응용한 사례인 셈이다.



거실서 국적 갈아타는 시대


중학교 때 외웠듯 국가는 국민·영토·주권으로 구성되지만, 그 실체는 기록이다. 국민의 출생·결혼·사망기록, 국토의 부동산등기, 주권의 법적 문서 등은 모두 기록이다. 거대한 관료사회는 이를 관리하고 이를 통해 움직이며 존재한다. 블록체인 덕에 비트네이션은 중앙관료기구 없이 작동할 수 있다. 비트네이션 국민으로서 내가 처음 해본 일도 결혼서약서를 블록체인에 시험 삼아 올려 본 것이었다. 비트네이션이 제공하는 공증 서비스를 이용하면 누구나 몇 번의 클릭으로 원하는 문서를 블록체인에 기록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참여자들의 컴퓨터에 조작 불가능한 기록으로 거의 영구히 남을 것이다.


비트네이션은 이를 통해 기존 국가 서비스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뿐 아니라 더 효과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 사례가 ‘난민 긴급 신분증 발급’이다. 고향을 버리고 떠난 수백만 시리아 난민이 겪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법적인 신분을 보장하는 신분증이 없다는 것이었다. 신분이 불분명하면 구호 서비스를 받는 데 제약이 많다. 비트네이션은 이들을 위해 자국의 신분증과 함께 비트코인이 들어 있는 직불카드를 발급하는 서비스를 도입했다. 굼뜬 기존 국가들이 하기 어려운 서비스를 발 빠르게 제공한다는 게 의의다. 난민 사태 발생 뒤에 도입돼 실제 효과는 미미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안 국가’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꼽혔다.


국가를 직접 건설하겠다는 구상은 사이버 세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표적인 집단이 ‘시스테딩 인스티튜트’다.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UN) 협약을 보면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약 370㎞) 밖은 어떤 국가의 권한도 미치지 않는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의 손자이자 구글의 기술자였던 패트리 프리드먼은 이곳에 개인별로 가로세로 50m의 모듈 형태 거주구역(시스테드)을 띄우고, 이를 결합해 국가를 만들 목적으로 시스테딩 인스티튜트라는 기업을 2008년 설립했다. 이들은 올해 첫 시스테드를 바다에 띄울 계획이다. 미래 구상은 공해상에 다양한 모듈 집합체(국가)들이 만들어지면, 각자 국가시스템을 내걸고 경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더 좋은 서비스를 찾아 자신의 모듈을 떼었다 붙였다 하며 가장 좋은 국가만 생존하리라는 것이다.


 

공해상에 미래국가 건설 추진도


비트네이션은 수잔 타르코프스키 템펠호프와 릭 팔크빙에 등에 의해 2014년 설립됐다. 템펠호프는 프랑스와 폴란드 출신 부모를 둔 스웨덴 출신 해커로, 미국 국방성의 계약직 개발자 등으로 일했으며 조부모가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팔크빙에는 지식재산권법 철폐를 위한 해적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비트네이션의 동력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오픈소스 운동이다. 오픈소스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소스코드(설계도)를 각자 독점할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눠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공유 운동을 말한다.


사실 비트네이션은 국가라고 하기엔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초기 화면도 수시로 바뀌고 에러도 많았다. 하지만 기자가 이런 에러를 채팅방에서 이야기하니, 다른 국민이 나서 문제 해결에 달라붙곤 했다. 기자의 지적에 템펠호프 대표도 나서서 “다른 프로그래머가 볼 수 있도록 깃허브(세계 개발자들의 최대 커뮤니티)에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아직 5000명 수준인 비트네이션 국민 다수는 비트코인에 관심이 많은 개발자다.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고, 막히면 함께 고민한다’는 정신이 국가까지 만들어보겠다는 ‘무모한’ 계획의 원천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비트네이션은 현실 세계 곳곳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에어비앤비(여행자와 빈방을 연결하는 공유경제 서비스)처럼 대사들이 자신의 집·사무실을 공유하겠다고 등록해 놓으면 국민 누구나 찾아가서 쓰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대사관이다. 한국의 유일한 대사관은 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가 공유한 서울 성북구의 포럼 사무실이다.


지난달 27일 비트네이션 한국 대사이자 <유엔미래예측보고서>의 글쓴이인 박 대표를 찾아가 만났다. 비트네이션은 차세대 국가인지, 허무맹랑한 상상인지 의견이 궁금했다. “온라인 국가는 오프라인 국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할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미래에 4~5개 나라에 속할 거예요.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비트네이션을 시작으로 여러 비슷한 국가 서비스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미래의 어떤 사람은 몸은 한국에 있어도 생활은 주로 그런 사이버 국가 가운데 하나에서 할지 몰라요. 그것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으니까요.”


디지털 물결에 빠진 국가들은 이미 힘을 잃기 시작했다. 초국적 인터넷 기업에 대해선 국민 국가가 좀처럼 법을 관철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구글은 한국 사람들도 쓰지만, 한국이 규정하는 개인정보 공개나 세금 등의 법적 책임은 좀처럼 지지 않는다. 90조원 가까운 매출의 구글이나 10억명 가까운 활동사용자를 둔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라면 국가를 만드는 상상도 해봄 직하다. 세계경제포럼이 2015년 세계 비즈니스 리더 800명을 조사한 결과, 10년 뒤면 블록체인으로 세금을 걷는 첫 정부가 등장하리란 답을 한 사람은 73%에 달했다.


 

“미래엔 4~5개 국적 가지게 될 것”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그의 책 <세계질서>에서 현대의 국가 개념이 정립된 기원을 1648년 유럽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꼽는다. 지금의 국가가 당연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고작 370년에 불과한 역사를 지닌 셈이다. 디지털 기술은 인터넷부터 웹 2.0, 사물인터넷까지 중앙집중형 구조를 깨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고, 사회도 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금의 사이버 대안 국가들도 리버테리언(자유의지론자) 엘리트들의 세금 회피 수단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단지 짐바브웨 같은 독재 국가나 시리아 같은 내전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국가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이들에게 사이버 국가가 대안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겉으론 문제없어 보이는 다른 나라들도 긴장을 해야 할지 모른다. 국민이 안방에 앉아서 언제든 국적을 갈아타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780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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