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콘텐츠 유료화의 미래 ' 스팀잇'
블록체인 기반 블로그 스팀잇, 콘텐츠 제작자에게 암호화폐로 보상… 
언론사들도 입성해 수익화 실험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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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지민 한겨레21 기자
변지민 한겨레21 기자 2018년 3월20일 15:45

암호화폐는 2017년 한 해 한국 사회에 뜨거운 투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현실에서 투기 말고 제대로 쓸모를 보여준 사례는 드물다. 대부분 아직 청사진만 제시된 상태다. 블록체인이 실제 사회적 기능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는 블로그 서비스 ‘스팀잇’(steemit)이다. 스팀잇을 통해 블록체인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 미래를 상상해보자. _편집자



스팀잇 코인 형상. Max Pixel
스팀잇 코인 형상. Max Pixel


 

오늘도 미술관이 열렸다. 큐레이터(관리자)가 정성껏 고른 아름다운 그림 10여 점이 전시됐다.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져 그런지 봄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았다. 사진, 수채화, 유화, 캐리커처, 도트 그림, 만화 등 장르를 초월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자니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다.


입장료는 무료. 작품은 매일 바뀐다. 작가들이 미술관으로부터 받는 보상은 다름 아닌 ‘암호화폐’다. 내 그림을 좋아하는 관객이 따로 챙겨주는 보상도 있다. 평론가들 눈에 띄어 작품이 인기를 얻으면 금액은 더 커진다. 신기한 점은, 이 미술관에서 돈 버는 사람은 있어도 돈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미술관이 현실세계에 존재할까? 얼핏 들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얘기지만, ‘르바 미술관’이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르바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는 스팀잇에서 ‘르바’(@rbaggo)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용자다.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역할을 맡은 ‘르바’는 역량 있는 작가들의 그림을 수집해 날마다 자기 블로그에 게시한다. 수많은 사람이 작품을 보고, 작가는 다음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르바 미술관을 찾는다. 입장료 없이도 작가 수십 명이 매일 수천원에 해당하는 암호화폐를 벌어가는 이유는 미술관과 작가들이 ‘보팅’(voting·투표)을 받기 때문이다. 보팅을 많이 받을수록 스팀잇이 자체적으로 찍어내는 암호화폐를 많이 받아갈 수 있다.


보팅 많을수록 암호화폐 많이 받아



보팅은 페이스북 등 다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좋아요’와 비슷하다. 내 돈을 들이지 않고도 남을 칭찬해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좋아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보팅을 통해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암호화폐를 받고, 영향력도 세지는 것이다(자세한 설명은 '아직도 저커버그 위해 무료봉사 합니까' 기사 참조). 스팀잇이 온라인 콘텐츠의 유료화를 이뤄내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전세계 미디어 업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이유다.


르바 미술관은 스팀잇의 매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관객은 ‘내 돈 들이지 않고도’ 선호하는 글, 그림, 사진, 작품에 보상할 수 있다(물론 스팀잇에 현금을 투자한 사람도 있지만 논외로 한다). 내가 열심히 글을 쓰고 SNS 활동을 하면 시스템이 일종의 ‘기본소득’을 준다. 그걸로 자신의 콘텐츠를 포함해 마음에 드는 콘텐츠에 보팅할 수 있다. 작게나마 보상을 받다보니 스팀잇엔 르바 미술관처럼 질 높은 콘텐츠로 누리꾼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전시관이 많이 개설돼 있다.


스팀잇은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여는 이벤트로 조용할 날이 없다. 30대 초반의 여행작가 김문환씨는 암호화폐를 상금으로 걸고 매주 ‘김작가 여행사진 공모전’을 연다. 최근 진행된 제5회 공모전에선 유럽 여행 사진을 주제로 출품된 사진 12편 중 3편을 뽑아 전시했다. 수상작은 참가자 투표로 선정했다. 김씨는 매주 1만~2만원에 해당하는 암호화폐를 지출하며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유를 “나의 여행기와 콘텐츠에 보팅해주는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다른 사용자들이 보팅해준 금액을 모아 공익 목적으로 쓰는 것이다.


아이디 ‘@hunhani’를 사용하는 이는 ‘kr-science’ 태그를 단 전문적인 글에 보상을 한다. 물리학, 원자력공학, 로봇공학, 생명과학, 의학, 양자컴퓨터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스팀잇에 글을 남기는 데 동기부여가 된다. 과학·정치·사회 분야를 넘나드는 칼럼으로 유명한 김우재 교수(캐나다 오타와대학 초파리 유전학자)도 최근 자신의 칼럼을 스팀잇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스팀잇에 전문 필자가 많아지는 이유로 “글값을 제대로 안 쳐주는 한국 매체들에 대한 불만과, 글에 대한 칭찬이나 공유 이상의 보상을 원하는 지극히 당연한 욕망이 만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암호화폐로 보육원 아이들 후원하기도


보팅을 십시일반 모아 기부하는 사용자도 있다. 프리랜서 작가 김현욱(37)씨는 스팀잇에서 받은 암호화폐로 보육원 아이들을 후원한다. 김씨가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을 기록한 글을 올려 그동안 후원받은 암호화폐는 약 400만원에 이른다. 김씨는 최근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영학 사건 등으로 기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커졌는데, 직접 후원하는 아이들을 만난 뒤 글을 쓰니 신뢰하는 분들이 늘어나 기부 금액도 커졌다”고 말했다.


평상시 자주 교류하던 사람이 모금을 하면, 이를 지켜보는 이들도 기부할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성공학 교육기업 대표 김세융(34)씨는 “사용자들이 끈끈하게 커뮤니티를 맺고 있어” 스팀잇에서 프로젝트 모금이 잘 이뤄진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스팀파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스팀잇에서 후원자를 모아 서울숲공원의 버려진 창고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렸다. 그가 이 사업을 기획한 이유는 “가상 속에만 있던 암호화폐가 실제 세상으로 나와 쓰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스팀잇에서만 700만원 가까운 금액이 모였다. 전문가 인건비와 나무 명패, 페인트 비용 등을 댈 수 있었다.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것은 스팀잇의 큰 장점이다. 블록체인 기반이라 암호화폐가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거래장부에 기록된다. 앞서 소개한 르바 미술관을 예로 들어보자. 보팅자 명단과 금액, 큐레이터 명단과 수고비, 작품 선정자 명단과 보상금 등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숨기거나 바꿀 수도 없다. 스팀잇에서 영향력이 큰 사용자들이 자신의 콘텐츠에 집중적으로 보팅하는 등 이기적 행동을 하다 들켜서 욕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래장부가 다 까발려 있어 감시가 가능한 덕분이다.


스팀잇의 보상 시스템은 콘텐츠 시장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송종식 제이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스팀잇에 올린 경험담에 따르면, 책을 냈을 때보다 스팀잇에 글을 썼을 때 수익이 두 배가량 컸다. 송 대표는 정보기술(IT) 분야 책을 썼을 때 월평균 30만원의 수익을 낸 반면, 스팀잇에서는 월평균 60만원의 수익을 냈다고 밝혔다.


책 출판 전에 콘텐츠를 미리 스팀잇에 올려 반응을 보고, 동시에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최근 두 달간 스팀잇 사용자 9명이 ‘이지스팀잇’이라는 제목으로 스팀잇에 글을 올렸다. 스팀잇 계정 만드는 법부터 글 쓰는 법, 보팅하는 법 등 스팀잇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안내서다. 반응이 뜨거워 실제 책으로 출판을 앞두고 있다.




신변잡기 글보다 길고 전문적인 글 인기


무료 연재되는 스팀잇 안내서 ‘이지스팀잇’.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네 컷 만화도 들어가 있다. 보팅을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야 힘(스팀파워)이 회복되는 과정을 게임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carrotcake
무료 연재되는 스팀잇 안내서 ‘이지스팀잇’.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네 컷 만화도 들어가 있다. 보팅을 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야 힘(스팀파워)이 회복되는 과정을 게임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carrotcake


 

이지스팀잇 프로젝트는 총 27편의 글을 올렸는데, 한 편당 십수만원에 해당하는 보팅을 받았다. 현금으로 환산하면 수백만원의 보상을 거둔 셈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이지스팀잇’의 필자 중 한 명인 김병무(33)씨는 “아직 현금화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대신 이 금액을 신규 가입자를 지원하고 스팀잇을 소개하는 데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스팀잇이 기존 콘텐츠 시장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콘텐츠가 스팀잇에서 먼저 대중성을 검증받고, 그 뒤 출판시장에서 팔리는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이 경우 저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군데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김씨는 다만 “스팀잇 사용자가 증가하면 보팅 이익이 분산돼 지금보다 한 사람이 얻는 수익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스팀잇의 보상 시스템은 콘텐츠의 질을 높이기도 한다. 스팀잇에는 다른 SNS보다 ‘길고 전문적인 글’이 많다. 김씨도 “신변잡기 글을 올렸을 때는 거의 보팅을 못 받았고, 쉬우면서도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의학 관련 글은 보팅이 잘된 편이었다”고 했다. 현재 스팀잇 글의 성격은 짧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상을 공유하는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보다는 전문 콘텐츠에 적합한 블로그와 비슷한 형태다. 하지만 추가 플랫폼이 개발돼 곧 다른 SNS에 가까운 플랫폼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스팀잇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수익 외에 스팀잇이 가진 장점이 또 하나 있다. 독자 피드백을 활발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팀잇에선 글쓴이뿐 아니라 독자도 보상을 일부 받아간다. 다른 사람의 글에 열심히 보팅을 하거나 댓글을 쓰면 그만큼 수익이 생긴다. 김병무씨는 “다른 블로그도 해봤지만, 스팀잇은 독자의 피드백이 활발해 내 글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스팀잇을 처음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보상에 주목하는데, 좀더 하다보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세융씨 역시 보상 못지않게 ‘소통’이 스팀잇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다른 스팀잇 고수들과 함께 3월부터 ‘스팀스쿨’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스팀잇에 처음 들어온 이들에게 스팀잇 이용 노하우를 알려주고, 참가자들끼리 네트워크를 이루게 해 성공적인 정착을 돕는 강좌다.


최근 언론사들도 언론사 공용 계정을 만들어, 스팀잇에 뛰어들어 수익화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민중의 소리> <서울경제> <비즈한국> 등이 스팀잇에 입성했다. <머니투데이>는 “계정을 만든 지 불과 보름 만에 100만원 가까운 보상을 받았다”고 기사에 실었다. 기자가 개인 계정으로 기사를 올리기도 한다. 다만 언론사 계정은 진입 초기에 반짝 관심을 끌고, 시간이 지날수록 보상이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기존의 정형화된 기사 형식 콘텐츠로는 스팀잇에서 장기 생존이 힘들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팀잇에서 주목받으려면 최적화된 콘텐츠 생산과 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온라인·모바일에 기반한 거친 콘텐츠 유통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든 미디어 그룹이 풀어야 하는 숙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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