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 '제곱투표' 도입, 예술품 상시경매…'래디컬마켓'이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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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김외현 2019년 10월29일 11:00
맷 프루잇 래디컬x체인지 대표. 출처=김외현/코인데스크코리아


정치 제도의 개선은 가능한가. 경제 시스템의 혁신은 가능한가. 사회 구조의 변혁은 가능한가. 이처럼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래디컬 마켓'을 들어봤을 법하다. 한국어 번역판은 나온 지 한달 남짓 됐지만, 미국에서 지난해 5월 출간된 원문을 이미 접한 이들도 많다. 접한 이들은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강하게 권하는 책이다.

사상의 전환을 꾀하는 내용인 만큼, 래디컬 마켓은 단순히 책에 머물지 않는다. 실험과 실천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곳이 래디컬x체인지 재단이다. 지난해 9월 출범한 이 재단은 각 지역 단체장과 의원 등 정치인들을 찾아가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물론 '전복적'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아이디어들이 단번에 실현될 수가 없다. 24일 서울을 방문해 코인데스크와 만난 맷 프루잇(Matt Prewitt) 래디컬x체인지 재단 대표는 "우리의 아이디어는 시간을 두고 그 논리를 생각해보면 머릿속에서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것들이다. 하지만 요약하기엔 쉽지 않아서 배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래디컬 마켓 책에 나오는 대표적인 아이디어들을 보면,

  • 부동산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하고, 그에 기초해 세금을 징수하되, 그보다 높은 매수 가격엔 바로 팔리도록 한다.

  • 1인1표가 아닌 제곱투표로 유권자들이 찬성과 반대의 강도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 큰 기업이 우수 인력을 초청해 개인과 경쟁하도록 하는 비자 정책을 개선해 개인이 이민자를 후원할 수 있도록 한다.

  • 데이터 생산을 노동으로 규정한다.


등을 꼽을 수 있다. 재단은 이를 어떻게 실천 또는 실현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전체적인 책 내용을 먼저 알고싶은 독자들께서는- 물론 책을 읽어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코인데스크에 실린 한국어판 소개 기사와 김진화 코빗 공동창업자 기고문 등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가장 진도가 빠른 것은 제곱투표 방식에 의한 의사 결정이다. 프루잇은 미국 콜로라도주의 민주당 하원 코커스(전당대회)가 지난 3월 예산 우선순위 결정에 제곱투표를 도입했다고 전했다. 래디컬 마켓 책에 등장했던 단순한 아이디어가 실제 정치에 도입된 것이다. 수십가지 정책 가운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각 의원이 단순히 어떤 안건을 중시하는지 뿐 아니라 얼마나 중시하는지도 반영될 필요가 있었다. 프루잇의 표현대로라면 투표가 "방향뿐 아니라 강도까지 표현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10개 안건에 대해 일반적으로 투표를 실시하면 각 안건에 각각 찬성과 반대 표를 1표씩 던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곱투표 방식에서는 10개의 크레딧을 가지고 각 안건에 1개 이상의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다만, 2표를 던지려면 그 제곱인 4개의 크레딧을 써야 한다. 남는 크레딧은 6개뿐이므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안이 줄어든다.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3표를 던지면 9개의 크레딧을 쓰고, 남는 크레딧은 1개뿐이다. 제곱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목소리를 더 크게 낼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소리를 크게 낸 사람만 이익을 보게 된다." - 맷 프루잇

콜로라도주 민주당 하원 코커스가 도입한 투표 시스템은 전직 게임개발자인 샌티아고 시리(Santiago Siri)의 비영리 스타트업 디모크라시닷어스(Democracy.Earth)가 개발했다. 프루잇은 "의원들은 자신의 크레딧(투표)이 각 안건에 몇개씩 배분되는지를 화면상에서 보면서 투표를 진행했다. 그들이 가진 표의 파워를 직접 본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가치에 대한 자체평가, 이른바 COST(Common Ownership Self-assessed Taxation) 매커니즘도 실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프루잇은 "가장 야심찬 프로그램이라고 봐야할텐데, 작은 프로토타입으로 적용하려는 이들이 있다"고 전했다.

이더리움 기반 음악 소프트웨어 서비스 우조(Ujo)의 창업자인 사이먼 드라루비어가 출범시킨 블록체인 예술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바코드로 '이 작품은 상시판매중입니다'라고 적어놓은 이 작품은 언제든지 더 높은 가격을 부르면 소유권이 이전된다. 자기가 정한 가치가 실제로 적용되는 것이다. 대신 보유하는 기간 동안엔 가격의 5%를 예술가에게 후원해야 한다. 토지의 세금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밖에 가상의 토지를 매매할 때나 거리 광고판 단가 책정 등에도 COST 매커니즘이 활용되기도 한다.
"정부가 특정 사업에서 정해진 숫자의 허가증을 갖고 이를 배포하고자 할 때에도 COST 매커니즘을 도입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시가 노점상 면허를 특정 숫자로 제한하고자 할 때 COST를 활용하면 투기꾼들의 조작을 피한 채 시장 가격이 결정될 수 있다." - 맷 프루잇

데이터 생산을 노동으로 규정하자는 움직임은 각종 서비스 플랫폼의 과도한 개인 정보 수집과 유용에 따른 폐해가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이용자들은 여러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지만, 그 결과 플랫폼의 마케팅 및 영업 대상이 되는 것 말고는 별 혜택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데이터 생산을 노동으로 규정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플랫폼 기업이 데이터를 이용하려면, 데이터 생산자인 이용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해야 하고, 복리를 제공해야 한다. 이용 가능한 데이터의 범주와 성격도 이용자들과 함께 협의해야 한다.
"현재 상태는 시장의 실패이자 기능의 한계이다. 필요한 것은 집단적 협상이다. 이용자들이 모여서 데이터 구매자인 기업들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가 노동이기 때문에 데이터 생산자들은 조합을 꾸릴 수 있다. 그 형태는 노동조합일 수도 있고 협동조합일 수도 있다. 조합은 페이스북 같은 데이터 구매자 기업을 찾아가서 집단적으로 협상을 할 수 있다. '집단'으로 나선다는 게 중요하다. 데이터는 중첩되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누군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그것은 내가 보낸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받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집단이 되지 않으면 효율적으로 거래할 수가 없다." - 맷 프루잇

'노동으로서의 데이터'는 아직 실질적으로 구현된 모델을 찾기가 힘들다. 프루잇은 "콜로라도와 캘리포니아, 워싱턴DC 등 지역에서 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연구하는 수준에서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래디컬x체인지가 하는 일이 바로 (앞에서 얘기했듯) 각 지역 단체장과 의원 등 정치인들을 찾아가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다. 왜일까? 프루잇의 표현대로라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이 가장 크다"는 점 때문이다.

프루잇이 대표(President)를 맡고 있는 래디컬x체인지 재단의 상근자는 2명 뿐이다. 또다른 1명은 예술가 출신으로 CEO 제니퍼 모론(Jennifer Morone)이다. 이밖에 계약 형태로 여러 지역에서 참여해 마케팅, 재무, 홍보 등을 담당하는 이들이 8~9명 있다. 재단의 무게감을 싣는 것은 이사회다. 래디컬 마켓의 지은이이자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 수석연구원인 글렌 웨일, 이더리움 공동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 대만 행정원 정무위원(장관)인 탕펑(오드리 탕) 등이 포진해 운영 방향을 결정한다. 재단 운영 비용은 카우프만(Kauffman), 휴렛(Hewlett) 등 비영리재단이나 비탈릭 부테린을 포함한 개인 기부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프로그래머 경력이 있는 변호사 출신인 프루잇은 집단소송이나 크라우드펀딩에 블록체인을 접목시킬 방안을 찾던 중 래디컬 마켓과 글렌 웨일을 접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됐다"고 말했다. 래디컬 마켓 책에는 '블록체인'이란 표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안으로는 블록체인 기술과의 접목이 끊임없이 시도된다. 제곱투표, COST 매커니즘, 노동으로서의 데이터 생산 등 모든 주제가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늘 인류에게 그 기술이 정치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진다. 가까이는 SNS와 정치의 결합이 그랬다.
"(SNS와의 결합은) 잘 안 된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실리콘밸리의 언어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더 저렴하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더 민주적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는데 너무 얄팍한 것 같다. 오히려 더욱 진지하고 더욱 세련된 언어를 보여주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약점이 무엇인지, 무엇이 민주주의를 덜 민주적이게 만드는지를 고민하고, 이를 어떻게 개선시킬지를 질문하고 실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이겨내고 더 큰 신념을 갖게해줄 것이다."

래디컬x체인지는 오는 11월22일 독일 베를린에서 소규모 행사를 연 뒤, 내년 6월 브라질에서 연례 컨퍼런스를 개최할 계획이다. 문의사항은 info@radicalxchange.org 로 보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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