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투사 해커, 혹은 어리숙한 바보
방북 혐의 체포 버질 그리피스를 둘러싼 논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eigh Cuen
Leigh Cuen 2019년 12월5일 15:00
버질 그리피스는 2016년 1월14일 페이스북에 이 사진을 올리며 "이 원숭이는 너무 욕심이 많았다. 나는 점잖게 바나나를 붙들고 있었다"고 적었다. 출처=버질 그리피스 페이스북.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블록체인·암호화폐 콘퍼런스에 참석한 혐의로 미국 사법 당국에 체포된 버질 그리피스(Virgil Griffith)의 의도와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논쟁이 월드컴퓨터(world computer)를 표방하는 이더리움의 취지와 이상을 둘러싼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그리피스는 추수감사절 당일인 지난달 28일 LA 공항에서 체포됐다. 미국 정부가 방북을 불허했는데도 평양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적 가운데 하나인 북한에 기술을 통해 제재를 회피하는 방안을 가르친 혐의가 적용됐다. 그리피스의 변호인단은 구속된 그리피스의 보석을 신청하기로 했고, 몇 주 안에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일단 그리피스는 구속 수사는 받지 않게 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 검찰이 그리피스를 전격 체포하자 곧바로 논란이 촉발됐다. 오픈소스 프로젝트와 관련해 인터넷에서 간단한 검색만 해도 다 알 수 있는 공개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 과연 미국의 대북 제재를 어긴 범죄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전 세계를 잇는 월드컴퓨터를 만들자는 이더리움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봐야 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이더리움 커뮤니티 안에서도 그리피스의 행동을 두고 의견이 갈린다. 북한이라는 가장 폐쇄된 사회에 직접 가서 오픈소스와 이더리움을 이야기한 것은 영웅적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어차피 토론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헛수고였을 뿐이라며 비웃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리피스를 로스 울브리히트에 비견하는 사람도 있다. 사이퍼펑크들이 영웅으로 추앙하는 울브리히트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암시장을 운영하고 범죄자금 세탁을 도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반대로 로라 신 기자처럼 그리피스가 북한 독재 정권이 짜놓은 각본에 놀아났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앞서 그리피스의 변호를 맡은 브라이언 클라인 변호사는 그리피스에 제기된 혐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우리는 고소장의 검증되지 않은 혐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버질은 모든 스토리가 나오게 될 재판정에서의 그날을 고대한다.”

4월 평양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실제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비롯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다. 해외 친북 단체인 조선친선협회의 알레한드로 카오 데 베뇨스(Alejandro Cao de Benós) 대표는 지난 6월 코인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체 암호화폐를 만들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5대 암호화폐 가운데 하나와 관련 있는 조직에서 일하는 외국인이 처음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와 함께 평양 콘퍼런스에 참석한 이탈리아인 파비오 피에트로산티는 “제재를 피하는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논의 주제에 있지도 않았다”며, 그리피스에게 제기된 혐의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피스가 북한에 가기 전인 2018년부터 북한에 암호화폐 관련 장비와 기기를 보내는 데 공개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피스는 북한에 간다는 사실도 트위터를 통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혔다. 스팽크체인(Spankchain)의 자문위원과 성인영화 배우 브레나 스파크스에게 공개적으로 북한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에 다녀온 뒤에도 그리피스는 트위터를 통해 고객신원확인(KYC) 규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북한이 암호화폐 거래소 사업을 하기 알맞은 곳이라고 주장했다. 연방수사국(FBI)이 작성한 고소장에는 그리피스가 남북한 사이에 암호화폐를 이용한 송금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구상했다고 적시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암호화폐를 이용해 남북한 사이에 송금을 집행하지는 않았다.

 


‘특별 프로젝트’의 정체는?


올해 나이 36세인 그리피스는 암호화폐뿐 아니라 전체 테크 업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인물이다. 그는 복잡한 컴퓨터 과학의 원리를 설명할 때도 서두르는 법 없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풀어갔으며, 웃을 때 보이는 보조개는 호의적인 인상을 준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에 그리피스를 가리켜 “테크 세계의 탕아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리피스는 위키피디아에서 편집 기록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위키스캐너(WikiScanner)라는 데이터마이닝 도구를 만들어 유명해졌다. 위키피디아에서 검색 결과로 나오는 자료와 콘텐츠를 누가 언제 어떻게 수정했는지를 추적해 확인할 수 있는 툴이다. 이때부터 그리피스는 컴퓨터 과학과 온라인 윤리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됐다.

2013년 그리피스는 비탈릭 부테린을 만나게 된다. 인터넷 세상의 개발자, 엔지니어,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특히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는 이들이 한데 모이던 시절에 만난 그리피스와 부테린은 비트코인에 대한 지지와 인터넷의 이상을 공유하며 금세 의기투합했다. 부테린은 이듬해인 2014년 스위스에서 이더리움 재단을 만들어 그가 꿈꿔온 새로운 암호화폐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피스는 지난 5월 인터뷰에서 이더리움 프로젝트에 관해 개인적인 의견을 내고 피드백을 주기는 했지만, 너무나 야심 찬 프로젝트여서 현실에서 구현하기에는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 이더리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실 비탈릭을 알고 지낸 것으로만 따지면 내가 이더리움 재단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오래됐다.”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리피스는 이더리움이 세상에 나오는 데 자신이 어느 정도 산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더리움 재단에는 그리피스를 다양한 이더리움 프로젝트를 기저에서 이끄는 리더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피스는 자신이 부테린이 쓴 이더리움 백서의 초고를 가장 먼저 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리피스는 캘리포니아공대(칼텍, Caltech)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었다. 부테린이 한창 백서를 가다듬던 시절 그리피스는 처음으로 북한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피스는 2016년 특별 프로젝트 총괄(head of special projects)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직함으로 마침내 이더리움 재단에 합류한다. 그러나 당시 그리피스는 인터폴과 싱가포르 사법 당국에 다크웹 데이터를 넘기려 했다는 이유로 다크웹 브라우저 토르(Tor) 커뮤니티에서 맹비난을 받으며 사실상 축출된 뒤였다. 토르 브라우저 이용자들은 기본적으로 브라우저 이용 내역을 복잡하게 섞어 기록함으로써 익명화하려는 이들인데, 그리피스는 데이터의 흐름을 분석해 바로 그 다크웹 브라우저 이용 내역을 알아내고 이용자의 IP 주소나 익명 사이트(onion hostnames) 이름, 시간 기록이나 HTTP 응답 코드 등을 정리해 판매하려 했다.

그리피스는 자신의 행동이 다크웹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며 정당화했다. 즉 토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려면 광고를 팔아 수익을 올리는 게 중요한데, 자신이 정리해 팔려고 한 기록들은 최소화된 파편 데이터로 여전히 익명성이 충분히 보장돼 구글 애드센스(AdSense)에 비하면 이용자의 브라우저 이용 내역을 파악하기 훨씬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 그리피스는 비영리단체 기금 지원이나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블록체인 프로젝트 등 정부와 이더리움을 새로운 형태로 연결하고 접목하는 일에 힘을 쏟아왔다. 그러나 지난 5월 인터뷰 당시 그리피스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에서 진행하는 특별 프로젝트의 내용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 프로젝트들은 뜬금없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당돌하다. 성공하기만 하면 엄청난 혁신을 앞당기겠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타격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리피스는 이더리움 관련 기업들이 꾸린 이더리움 기업동맹(EEA)의 공동의장이기도 하다. 이더리움의 연구·개발에 관해 전체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더리움 리서치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직접 소유하고 있는 장본인도 그리피스다. 그리피스가 체포된 뒤 당국이 웹사이트를 돌연 폐쇄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던 이더리움 커뮤니티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이더리움 리서치 웹사이트의 데이터를 백업해두고 사본을 만들어놓았다.

지난주 그리피스가 체포된 뒤 이더리움 재단은 성명을 내어 그리피스가 북한에 간 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여행이었고, 재단 차원에서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며 선을 그었다. 다만 이더리움을 이끄는 주요 인물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나라를 방문하거나 논란의 정치인과 친분을 맺는 일은 전에도 많았다. 당장 비탈릭 부테린은 2017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났다. 타임은 푸틴이 부테린과 만난 뒤 베네수엘라의 디지털 화폐인 페트로(petro)의 구상을 구체화하고 본격적인 지원을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부테린과 이더리움 재단은 그리피스의 방북과 체포, 평양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관한 취재 요청에 따로 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더리움 기업동맹 웹사이트에 가보면 공동의장 이름에 그리피스가 빠져있다.

 

트위터에서 이어지는 장외 논쟁


비탈릭 부테린은 체포된 친구를 변호하고 나섰다. 부테린은 미국이 “공개된 정보를 전달하는 프로그래머들을 뒤쫓는 일”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무부가 북한에 가겠다는 그리피스의 신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리피스가 여행을 강행했다는 사실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더리움 벤처 스튜디오 컨센시스(ConsenSys)의 엔지니어인 조셉 드롱은 그리피스에게 제기된 모든 소를 취하해 달라는 청원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시태그는 #FreeVirgil을 붙였다.

이더리움 지지자 가운데는 벌써 그리피스를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인터넷 활동가 애런 스워츠(Aaron Swartz)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스워츠는 지난 2013년 26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보 공개와 자유화, 검열 반대를 외쳐 온 스워츠는 학계 연구를 불법으로 공개하려 한 혐의로 미국 정부로부터 35년 징역형과 10억 원의 벌금형을 구형받고 소송을 벌이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피스와 스워츠는 실제로 친구이자 동료 개발자로 토르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피스와 스워츠를 둘러싼 소송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조 돌란 변호사는 그리피스의 방북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거나 외교 전략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돌란 변호사는 오사마 빈라덴의 사위인 슐라이만 아부 가이스가 미국인을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테러 공격을 지원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을 때 아부 가이스를 변호했던 변호사였다.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란 출신 스위스 변호사 파테메 파니자데는 트위터에 “검열이 쉽지 않은 기술을 장려하고 촉진하는 일과 규제에 어긋나는 거래를 지원하는 일 사이에 명확한 경계는 없다”고 썼다.

법무법인 번 앤드 스톰(Byrne & Storm)의 대표 변호사 프레스턴 번은 이더리움 재단이 이번 일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기업은 어떤 사업을 하건 다양한 위험을 늘 경계해야 한다. 소셜미디어 때문에 빚어지는 일은 물론이고, 기업의 임원이나 주요 인사가 개인적으로 하는 행동 때문에 사업 전체가 위험에 빠질 때도 있는 법이다.”

로라 신 기자는 모든 것을 철저히 검열하는 북한 정권의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즉 그리피스가 아무리 교육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더라도, 철권통치를 펴는 김정은 정권은 그 내용을 정권이 유리한 쪽으로만 받아들이고 사용할 뿐이며, 일반 시민들은 인터넷도 쓸 수 없으니 그리피스가 헛수고만 했다는 것이다. 미국 인권재단(Human Rights Foundation)의 알렉스 글래드스타인 전략기획실장이 “김정은 정권에 무엇이든 기술을 가르치는 행위는 결국, 나쁜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더리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그리피스의 방북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기업가 엔리코 탈린은 그리피스를 “평화 사절”이라고 묘사했다. 어찌 됐건 북한에서 그리피스가 한 발표의 제목도 '블록체인과 평화'였다. 탈린은 그리피스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 미국 정부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에는 막을 수 없는 평화의 물결에 이더리움은 이미 동참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더리움의 열성 지지자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트코인 초기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비트코인캐시의 대표적인 투자자인 로저 버도 그리피스의 방북을 반전 운동의 하나라고 치켜세웠다.

익명을 요구한 이더리움 기업동맹의 소속 회원도 정부가 다른 나라와의 학술적 교류를 가로막고 제한하는 행위는 '경찰국가'의 면모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더리움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훈련받은 직업 외교관이 아니므로” 외교적인 부분에서 잘못할 수 있다는 점도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체포로 인해,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서 뜻이 맞는 개발자와 지지자를 규합해 암호화폐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이들이 위축될 수 있다고 그는 내다봤다.

그리피스의 행위를 블록체인 혁명을 직접 전파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시선도 있다. 그리피스처럼 서툴게 진정성만 가지고 접근할 일이 아니라 좀 더 정교하게 전략을 짜서 진행할 수 있도록 정치나 로비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영입해 좀 더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더리움 기업동맹의 회원은 그리피스가 체포된 사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관련 논의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일이 세간의 이목을 끄는 한 사법 당국은 계속해서 그리피스가 북한에 가서 한 일의 위법성을 부각하려 할 것이다. 그리피스를 체포하고 기소한 뉴욕 남부지검은 미국에서 가장 선제적으로 사건을 수사하고 구형하는 검찰 조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이트칼라 관련 범죄에 관한 한 꼭 그런 것도 아니다.” - 조 돌란 변호사

번역: 뉴스페퍼민트
· This story originally appeared on CoinDesk, the global leader in blockchain news and publisher of the Bitcoin Price Index. view BPI.
· Translated by NewsPeppermint.

제보, 보도자료는 contact@coindeskkorea.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