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과 버스정류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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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선 기자
정인선 기자 2020년 6월16일 07:00
출처=정인선/코인데스크코리아
출처=정인선/코인데스크코리아

버스 정류장 위에 햇볕을 피하라고 지붕을 만들었지만, 그 아래 벤치에는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그 덕에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은 정류소 뒤 좁다란 길가 그늘에 서 있다. 낮 시간대에 해가 비추는 방향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설계한 이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사용자 경험이 형성된 대표적 사례다.

 지난주 그라운드X가 최근 출시한 디지털 자산 지갑 클립(Klip)을 주제로 웨비나를 진행하는 내내 위 장면이 떠올랐다. 클립의 사용자 경험도 버스 정류장 그늘막처럼 서비스를 만든 이들의 바람과는 다소 다르게 굳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기우 때문이다.

 그라운드X는 약 1년 전인 지난해 6월 클립 출시 계획을 처음 공개했다. 그라운드X는 카카오톡과의 연계 등을 통해 기존 블록체인 관련 서비스들의 어려운 사용자 경험과 차별화를 이룰 거라고 강조해 왔다. 

 출시된 서비스를 실제로 이용해 보니 과연 그랬다. 기존 카카오 서비스에서 본인 인증 절차를 이미 거친 덕에, 별도의 인증 절차 없이 여섯 자리 비밀번호 입력만으로 가입부터 토큰 전송까지 대부분의 기능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QR코드를 통한 전송과 주소 복사, 최근 토큰을 전송한 친구 리스트 등의 기능도 편리했다.

 그라운드X는 클레이(KLAY) 및 KCT 기반 토큰뿐 아니라 게임 등 서비스가 발행하는 대체불가능토큰(NFT, non fungible token)의 보관과 전송이 손쉽다는 점을 클립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NFT라는 어려운 용어를 ‘카드’로 대체해 블록체인이 생소한 이용자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려는 노력도 돋보였다. 

 그런데 정작 주고받을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서비스’ 메뉴가 소개하는 클레이튼 기반 서비스들의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해 봐도, 정작 서비스 안에서 획득한 아이템이나 캐릭터, 쿠폰 등을 아직 NFT, 아니 카드로 바꿔 클립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라운드X 관계자는 “빠르면 6, 7월 안에 파트너 기업들이 다양한 카드 활용 사례를 선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자들에게 와닿는 예를 좀 들어 달라”고 하자 관계자는 게임 아이템을 예로 들었다. 헤비 유저가 가진 레벨이 높은 캐릭터를 카드로 바꿔 클립을 통해 친구에게 보내면, ‘뉴비’ 친구도 높은 친구에게 받은 높은 레벨의 캐릭터를 초기부터 활용해 빠르게 레벨을 올려 가며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거였다. 

 이내 게임 아이템을 카드 형태로 바꿔 주고받는 시장이 형성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묻자 관계자는 다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이론상 가능은 하겠지만 장려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약관 이야기를 꺼냈다.

 “약관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리적 목적으로 클립 서비스를 활용해선 안된다고 ‘회원의 의무’에 적어 놓았습니다. 이용자들 간 거래를 활성화하기보다는 게임 아이템 등의 전송을 쉽게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블록체인 기반 게임 서비스들을 취재하며 들은 이야기들과는 다소 상반된 이야기였다. 그동안 만난 게임 개발사들은 대부분 게임 아이템을 NFT로 바꿔 탈중앙화 된 거래 플랫폼에 올리면, 이를 암호화폐로 사고팔아 쉽게 현금화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게임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하려 한다 설명했다. 암호화폐를 통한 보상이 게임 이용자들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는 이른바 ‘Play to earn(게임을 하며 돈도 번다)’ 가설이다. 클립의 ‘영리 목적 이용 금지’ 약관은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처럼 보였다.

 사실상 전국민이 사용하는 메신저에 직접 연동된 서비스이기 때문에 규제 당국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다는 속사정은 이해한다. 그럼에도 솔직히 ‘이럴 거면 왜 블록체인을 쓰나’하는 생각을 피하기 어려웠다. “클레이를 투자 대상이 아닌 다양한 기능을 갖춘 플랫폼 토큰으로 봐 달라”는 그라운드X측 당부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입 이벤트로 선착순 10만명에게 지급한 50클레이가 ‘전국민 재난지원금’으로 불리며 중고나라에 매물로 나온 웃지 못할 상황도 떠올랐다.

 한재선 대표는 웨비나 전화 인터뷰에서 “클립이 국내 블록체인 업계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줄 거라고 보냐”는 질문에 “업계보다는 고객을 먼저 봤으면 좋겠다”면서, “업계보다도 일반 대중이 쉽게 디지털 자산에 접근할 방법을 만들어 줬다는 데에 클립 출시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지인들 중 누가 클립에 가입했는지 살펴봤다. 클립이 지원하는 ‘이미 클립 회원인 친구’ 리스트 기능 덕에 쉽게 살펴볼 수 있었다. 아직까진 블록체인 기업 관계자나 관련 매체 기자가 대다수였다. 평소 IT에 관심 많은 지인도 일부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아직 세상에 나온지 채 2주밖에 되지 않은 서비스이니, 모든 게 기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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