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의 끝은 어디인가
가계대출 규모 세계 최고 수준…임계점 도달한 듯
국제결제은행(BIS)·국제금융협회(IIF) 분석 44개국 중 5위
올해 1분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97.9% 기록
미국 75%, 영국 84%, 일본 57%, 중국 58% 등 주요국 추월
한국 가계부채 5년 전 ‘초이노믹스’로 급증
현 정부서도 계속 늘어…대내외 충격에 취약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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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한겨레 기자
박현 한겨레 기자 2020년 9월14일 08:00

‘58조5543억원.’

이달 초 마감한 카카오게임즈 공모주를 배정받기 위해 투자된 청약증거금 총액이다. 공모주 청약 역사상 최대 규모다. 지난 6월말 SK바이오팜의 기록(30조9899억원)을 두달 만에 갈아치운 것이다. 여기에 몰린 투자자 수는 무려 41만7천여명. 투자자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청약을 받던 삼성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의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은 한때 먹통이 됐고, 스마트폰 이용이 서투른 노인들은 코로나19 감염 우려에도 객장까지 나와 청약을 했다. 투자 광풍, 아니 ‘돈 놓고 돈 먹기’식의 투기 광풍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마치 20년 전 닷컴 버블 때를 연상케 한다.

 닷컴 버블 때와 한가지 다른 점은 투자자들이 한결 손쉽게, 훨씬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단 몇분 만에 수천만원에서 심지어는 1억원이 넘는 돈까지 신용으로 빌릴 수 있다. 이자도 연 2~3%대로 싸졌으니, 이런 기회를 잡지 않으면 오히려 ‘바보’가 된 듯한 분위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돈을 벌 기회가 있으면 투자금이 밀물처럼 몰려드는 것이다. 실제로 카카오게임즈 공모주 청약이 진행된 시기인 지난 1~2일 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에선 신용대출이 폭증했다. 5대 시중은행에서만 무려 4조7천억원의 신용대출이 나갔다. 전달인 8월 한달간 이들 은행의 신용대출액은 4조775억원으로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는데, 단 이틀 만에 이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카카오뱅크에선 신용대출 신청이 몰리는 바람에 한동안 처리 지연 사태마저 빚어졌다.

출처=한국거래소
출처=한국거래소

 올해 들어 부동산 투기에 이어 주식시장에서도 투기 광풍이 불면서 한동안 묻혀있는 듯했던 가계부채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가계부채 문제는 10여년 전부터 계속해서 우리 경제의 최대 복병으로 꼽혀와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만성이 된 듯하다. 전문가나 금융당국 관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항상 잠재적 위험이었지만 아직까지 별일 없지 않았냐는 안이한 태도마저 감지된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조금 다른 것 같다. 8월 한 달 동안에만 가계대출이 무려 14조원이 늘었다. 폭증이다. 이는 ‘빚 내서 집 사라’고 권했던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재임 시기인 2016년 11월(15조2천억원)과 그해 8월(14조3천억원)에 이어, 2015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세번째로 많은 것이다. 특히 신용대출이 8월에만 6조2천억원이나 증가했다. 이는 월별 기준으로 역대 최대다.

 한 시중은행 자금담당자는 신용대출 급증 이유로 간명하게 세가지 현상을 들었다. ‘동학개미, 영끌, 전셋값.’ 주식투자와 부동산투자 자금을 마련하고, 급등하는 전셋값에 돈이 모자라 빚을 낸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이를 조금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분석의 요지는 비슷했다. 한은 금융시장국 윤옥자 과장은 “아파트 분양 계약금과 최근 오른 전셋값 등 주택 관련 자금 수요, 공모주 청약 증거금 납입과 상장주식 매수 등을 위한 주식투자 자금 수요, 생활자금 수요 등이 신용대출 증가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최근 상황은 금융위기의 역사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찰스 킨들버거 전 미국 MIT대 교수의 경고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투기에서부터 20세기 말 일본 부동산 버블, 미국 닷컴 버블까지 수많은 자산가격 거품과 붕괴 역사를 연구한 뒤 자산가격 거품은 거의 언제나 신용 공급의 확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경제학계의 고전이 된 저서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에서 ‘자산가격의 거품은 신용의 증가에 달려있다’는 공리를 주장했다. “투기적 광기는 통화와 신용의 팽창을 통해 그 속도가 빨라진다. 통화와 신용의 팽창 대부분이 광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경기 확장기의 빈도가 광기의 빈도보다 훨씬 더 높다. 그러나 광기가 발생할 때는 항상 신용의 팽창을 동반했다.” 신용 팽창은 마치 ‘화염에 기름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어느 수준이고 얼마나 위험할까. 전문가들은 가계부채의 위험성을 판단할 때 과연 가계가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중요시한다. 부채가 많아도 갚을 능력이 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국제결제은행(BIS)과 국제금융협회(IIF)는 오래전부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자료를 분기별로 내놓고 있어 국제 비교를 할 때 아주 유용하다. 우리나라는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이 비율이 97.9%로 북유럽 3개국과 캐나다·스위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다. 2007년 부동산시장 발 부채 위기를 겪었던 미국과 영국은 각각 75.6%, 84.4%로 우리보다 훨씬 낮다. 동아시아에서도 일본과 중국은 각각 57.2%, 58.8%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덴마크가 111.7%로 가장 높고, 노르웨이 104.8%, 네덜란드 99.8%로 우리보다 높다. 스웨덴은 88.5%였다. 전문가들은 북유럽 국가의 경우 독특한 주택금융 제도와 막대한 연금 등의 특성이 있어 우리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규모가 세계 최고가 된 것은 4~5년 전부터다. 2014년 4분기에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0.1%로 미국(79.7%)을 앞질렀으며, 2016년 2분기에는 영국마저 따돌렸다. 박근혜 정부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주도가 돼 주택 관련 대출규제를 대폭 풀어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최 부총리는 2014년 7월16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부동산규제가 오히려 실수요자와 관련 종사자들에게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경기가 살아나고 심리가 살아날 때까지 거시정책을 과감하게 확장적으로 운용하고, 한 겨울에 한 여름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부동산시장의 낡은 규제들을 조속히 혁파해야 합니다.” 부동산 규제완화를 우선적으로 실시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일주일쯤 뒤인 7월24일 이른바 ‘7·24 대책’을 발표했다. 은행의 주택 담보인정비율(LTV)을 50%에서 70%로 20%포인트 완화하고, 총부채상환비율(DTI)는 50%에서 60%로 10%포인트 완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이른바 ‘빚 내서 집 사라’는 정책이 본격 시동을 건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경기활성화 대책으로 부동산 대출규제를 완화하면서 주택가격은 오르기 시작했고, 덩달아 가계부채도 급증세를 탔다.

자료=국제결제은행(BIS), 국제금융협회(IIF)
자료=국제결제은행(BIS), 국제금융협회(IIF)

 국제결제은행에서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의 임계점을 대략 85% 안팎으로 본다. 가계부채가 단기적으로 소비를 늘려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주지만 이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결제은행 연구진이 1980년부터 2010년까지 선진 18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한 수치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수준이 임계점에 근접한 것도 이 시점이다. 2016년 3분기(85.7%)에 처음 85%를 넘었다. 흔히 참여정부 시기에 집값이 급등하면서 가계부채가 큰 문제였다고 생각하는데, 참여정부 시기에는 이 비율이 60%대 후반이었다. 이어 2008년 2분기 때 처음 70%를 넘어섰고, 6년 만인 2014년 4분기에 80%를 돌파했다.

 현 정부 들어서도 증가 추세가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만 약 10%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2분기에 88.3%에서 출발해, 2018년 주택가격이 급등하면서 대출이 늘어 90%선을 넘었으며, 올해 1분기에 97.9%에 이르고 있다. 올해 2분기 이후에는 주택가격 급등과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가계대출 수요가 급증한데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자체가 마이너스가 예상되는 탓에 이 비율은 연내에 100%를 넘어설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가계부채 관리에 다시 비상이 걸린 이유다.

 가계부채 과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많은 가구들이 한계상황에 직면할 경우 가계부실이 심화해 금융불안과 경제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예기치 않은 대내외적 충격이 발생할 경우 위기의 촉발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대다수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가계신용 확대로 주택가격 버블이 커지고, 버블 붕괴를 계기로 가계부실이 확대한 데 기인했다”고 말했다.

자료=한국은행, 금융위원회
자료=한국은행, 금융위원회

 가장 가까운 금융위기였던 2007~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4년에 85%를 넘어선 뒤 계속 높아져 위기의 정점이었던 2008년 98%까지 치솟았다. 결국 금융위기를 맞고 나서야 이른바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 비율은 2011년 80%대로 낮아졌고, 2014년 70%대로 떨어진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말이 좋아 디레버리징이지 수많은 채무자들이 집이 압류당해 길거리로 쫓겨나는 등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경제부처 관료들도 가계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고소득·고신용 계층 중심으로 부채가 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반의 진실일 수 있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워낙 높아진 탓에 고소득·고신용 계층도 부담이 커진 게 사실이다. 예기치 않은 대내외적 충격에 올 경우 집값이 폭락하고, 금리가 오를 경우 빚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경우도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았지만 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이런 약한 고리를 시발로 해서 부실이 확산되는 데 금융위기의 전형적인 경로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인해 정책 당국자들은 지금 딜레마에 빠졌다.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 등 일시적으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경제주체들이 적지 않은 만큼 자칫 자금줄을 죄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계층에게는 금융이 산소호흡기처럼 중요하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가계에는 계속해서 유동성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이용해 대출을 손쉽게 받아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는 경로는 최대한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훗날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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