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기관투자자 위한 인프라 갖춰지나
빅 머니가 들어올 수 있는 여건: 수탁, 선물, 장외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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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김병철 2018년 12월19일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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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시장에서 개인 투자자의 수는 계속해서 정체되는 반면, 기관 투자자의 투자 비율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기관 투자자들은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새로운 투자처로 바라보고 있다.”

지난 11월 초 미국의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낸 ‘비트코인 현황’ 보고서의 내용이다. 최근 암호화폐 가격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비트코인캐시 해시전쟁’ 직전에 나온, 암호화폐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보고서라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기관 투자자들이 뛰어들 수 있는 여건이 암호화폐 시장에 하나씩 마련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인프라가 갖춰지면 기관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할 수 있고, 이는 다시 더 큰 인프라를 구축하는 선순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지만 개미 투자자가 아니라 수조원을 굴리는 투자은행, 헤지펀드 등 기관 투자자들이 뛰어들면 암호화폐 시장의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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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투자자의 필수 진입조건: 수탁


기관 투자자가 암호화폐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믿을 수 있는 수탁기관이다. 투자한 암호화폐를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거래소였던 일본의 마운트곡스는 약 85만BTC(당시 약 5000억원)를 해킹당해 파산했다. 한국 대형 거래소인 빗썸도 지난 1월 당시 350억원 규모의 암호화폐를 해킹당하는 등 사고는 이어지고 있다.

수탁 서비스는 고객의 자산을 위임받아 운용하는 전통 금융시장에서 발달했다. 수탁 기업은 주식, 채권, 펀드 등 금융자산과 부동산 같은 실물자산을 보관하고 관리한다. 안전한 보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배당, 세금 등까지 처리해준다. 한국에선 주로 시중은행이 수탁 업무를 맡고, 미국에는 노던트러스트, 스테이트스트리트, 뉴욕멜론은행 같은 글로벌 수탁전문 은행이 있다.

최근 암호화폐 시장에서도 수탁기관들이 등장하고 있다. 세계 5대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 인베스트먼트는 내년 자회사를 통해 기관 투자자를 대상으로 암호화폐 수탁, 거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고객이 맡긴 자산 규모만 약 8100조원인 피델리티가 향후 암호화폐가 운용자산으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이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일본의 글로벌 투자은행 노무라도 지난 5월 암호화폐 지갑 회사 렛저 등과 함께 수탁기업 고마이누를 설립했다. 골드만삭스는 월스트리트 회사들의 암호화폐를 관리한다고 밝힌 수탁 기업 비트고에 투자했고, 스테이트스트리트와 노던트러스트 등도 암호화폐 수탁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미래금융연구센터장은 “암호화폐 거래소는 해킹 때문에 불안하고, 각자 보관하는 것도 개인키를 분실하면 불편하다”며 암호화폐 수탁기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통 자산도 위험해서 수탁 시장이 생겼는데 암호화폐는 더 위험하기 때문에 미래 금융의 성장 산업으로 커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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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를 줄여줄 헤징 수단: 선물


기관 투자자가 암호화폐에 투자하려면 선물 상품이 필요하다. 주식시장에서도 가격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선물, 옵션 등으로 헤징한다. 현물(주가, 환율, 금)의 가격이 오르거나 내려도, 현물과 반대 포지션으로 설정한 선물이 손해를 상쇄하는 개념이다.

블록체인 투자자문사 아톰릭스컨설팅의 황현철 파트너는 “1조달러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가 1%만 암호화폐에 넣어도 엄청나게 큰 금액이다. 운용할 때 헤징할 수 있는 시장이 있어야 이들이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규모 기관 투자자들을 위한 이런 인프라가 암호화폐 시장에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 미국 규제당국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와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비트코인 선물 상장을 승인했다. 다만 황 파트너는 “두 거래소는 현물이 아니라, 계약한 가격과 실제 가격의 차이를 현금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라 진정한 의미의 헤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금 선물을 샀는데 나중에 금이 아니라 금에 해당하는 현금으로 받는 방식이다.

블록체인 업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건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모회사인 인터콘티넨털익스체인지(ICE)가 내년 1월 출시를 준비 중인 암호화폐 거래소 백트(Bakkt)다. 백트는 비트코인 선물 상품을 취급하기 위한 규제당국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으며, 시카고의 두 거래소와 달리 현물 결제 방식이다.

피델리티, 나스닥 벤처스 등이 2750만달러를 투자한 암호화폐 거래소 에리스엑스(ErisX)는 이미 선물상품 취급 인가를 받았다. 또한 미국 증권거래소(나스닥)도 내년 1분기에 비트코인 선물 상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월스트리트의 글로벌 금융사에서 일했던 황 파트너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미국의 전통 금융거래소들이 앞으로 암호화폐 시장의 성장을 가정하고 준비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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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위한 중개 플랫폼: 장외거래


주식시장에서 장외거래(OTC)는 거래소 밖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를 뜻한다. 만약 대형 기관 투자자가 보유한 주식을 거래소에서 팔기 시작하면 시장에 금방 이 사실이 알려져 주가가 떨어진다. 대량 거래를 하는 기관 투자자들이 장외거래를 하는 이유다.

암호화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고래'라 불리는 큰손들은 장외거래를 통해 거래한다. 만약 기관 투자자가 암호화폐 시장에 들어오려면 장외거래가 꼭 필요하다. 대량 물량을 확보할 수 있고, 사전에 정확한 가격을 알아야 거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외거래는 크게 두 방식으로 나뉜다. 장외거래 기업이 고래들을 중간에서 연결하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 에이전시형과, 기업이 고래에게 직접 매수, 매도하는 자기자본(Principal)형이 있다.

미국 금융회사 DRW가 2014년 만든 암호화폐 장외거래 기업 컴벌랜드는 후자에 속한다. 컴벌랜드의 최소 거래 단위는 10만달러(약 1억1000만원)다. 홍준기 컴벌랜드 코리아 대표는 “컴벌랜드 설립 초기의 투자자는 거의 개인이었다. 하지만 이젠 미국 고객의 90%가 법인이다.”라고 말했다.

골드만삭스가 투자한 암호화폐 금융회사 서클도 장외거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미국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도 지난 11월부터 기관 투자자를 위해 이 서비스를 시작했다. 홍 대표는 “장외거래 시장은 기관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시장이 전문화, 선진화되려면 기관들 참여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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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철학과 배치된다는 지적도


전통 금융기관의 암호화폐 시장 진출은 네거티브 규제 방식인 미국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선 정부가 암호화폐를 금융상품으로 인정하지 않아 제도권 금융기관의 진출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다. 암호화폐를 규정하는 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암호화폐 투자용 계좌를 만들 수도 없고, 투자했더라도 배임 혐의 소송과 금융감독원의 규제에 부딪칠 수 있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더라도 현재 암호화폐 거래소는 금융기관이 뛰어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암호화폐 수탁, 선물, 장외거래 등의 인프라가 갖춰져야 그나마 금융기관이 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이라도 생긴다는 얘기다.

강대권 유경피에스지(PSG)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미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런 서비스들이 빅 머니가 투자할 수 있는 인프라로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1년 동안 시가총액, 거래량도 줄고 사회적 신뢰도 떨어졌다. 문 안이 시궁창이 됐는데 뒤늦게 문이 생겼다고 빅 머니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갈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런 인프라 구축이 ‘정부가 아닌 기술로 신뢰체계를 만든다'는 블록체인의 탈중앙화 철학과 배치되는 모순도 있다. 암호화폐가 금융상품으로 인정받고 중앙화된 제도권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강 본부장은 “올해 초 암호화폐가 1000조원 시장이 되니 피델리티가 수탁 사업을 준비했다. 근데 그게 나오는 데 1년이나 걸렸다. 탈중앙화를 표방하는 암호화폐가 이렇게 느려터진 중앙화 시스템에 소속돼 좋다고 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12월19일치와 인터넷한겨레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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