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가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편집장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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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재
유신재 2019년 8월1일 08:00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창설됐다. 물론 미국이 주도했다. 마약과의 전쟁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고, 그해 미군은 파나마를 침공했다. 새로운 국제기구의 최대 과제는 마약조직의 돈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세계 모든 금융기관들이 지켜야 할 40개항의 권고(recommendation)가 나왔다. 2001년 뉴욕 국제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린 911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조직의 돈줄을 차단하기 위해 9개항의 권고가 추가됐다. 이름은 권고지만, 이를 어기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퇴출된다. 30년 동안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의 권고는 세계 모든 금융기관들이 최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로 작동해왔다.

마약과 테러를 막기 위한 자금세탁방지라고 하면 뭔가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만 금융기관을 통해 돈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들은 계좌 개설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정부가 발급한 신분증은 물론 재직증명서, 세금납부영수증 따위를 요구한다.

금융기관들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에서 테러 사건은 잊을만하면 일어나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마약범죄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30년 동안 이어진 자금세탁방지 노력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테러와 마약범죄가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반면 의도치 않은 부작용은 분명하다. 제대로 된 정부를 갖추지 못한 저개발국가 국민들은 신원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세계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됐다. 세계은행은 2017년 기준 은행 계좌가 없는 성인이 17억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테러범 혹은 마약범은 아닐 것이다.

금융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가난의 악순환을 뜻한다. 가난은 테러조직과 마약산업이 번성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비트코인이나 페이스북이 만들려는 리브라와 같은 암호화폐에 30년 된 자금세탁방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려 하고 있다. 암호화폐가 테러자금이나 마약범죄에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다.

암호화폐는 거래자에게 익명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누구나 자금의 이동을 볼 수 있는 투명성을 제공한다. 신원확인에 의존하지 않고 거래행태 분석을 통해 불법적 자금 흐름을 가려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내달 3일 부산에서 열리는 블록체인 행사 댁스포에서 이런 기업들을 만날 수 있다. 나쁜 놈들의 돈줄을 막으면서도 포용적 금융을 달성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 질서의 가능성을 외면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칼럼은 <한겨레신문> 8월1일자와 <인터넷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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