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소유는 독점…경매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소유권 아닌 사용권 놓고 경매하는 ‘시장급진주의’ 제안…‘더 많은 시장’에서 해법 찾자는 ‘급진적 자유주의’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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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도서출판 부키


 

‘리투르지’.

흔히 종교 행사에서 낭송하는 기도문(전례문)으로 알려졌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존재했던 독특한 사회 제도의 이름이기도 하다. 당시 그리스 사회는 군대 유지나 건설 등 공공사업에 필요한 돈을 1000명의 최상위 부자들한테서 걷었다. 누가 가장 부유한 1000명인지 어떻게 가려냈을까. ㄱ이란 사람이 후보로 꼽혔다 치자. 그는 자신보다도 재산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ㄴ)을 ‘대타’로 지목할 수 있다. 이때 ㄴ은 순순히 의무를 받아들여 나라에 돈을 내거나, 아니면 안티도시스(교환소송)라 불리는 절차를 거쳐 자신을 지목한 ㄱ의 전 재산과 자신의 전 재산을 맞바꾸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 모두가 자신의 재산 규모를 정확하게 드러낼 동기를 부여하는, 일종의 경매제도다.

얼핏 뜬금없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만일 현대 사회의 재산권에도 이런 ‘자기평가’ 방식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을 스스로 매겨 공표하되, 반드시 그 가격 기준으로 세금을 물어야 한다.(Your Price Your Tax) 또한 누구나 그 가격에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해당 부동산을 넘겨야 한다. 가격을 실제 가치보다 부풀리면 그만큼 세금 부담이 늘고, 세금을 줄이려 꼼수를 부리면 다른 사람에게 부동산이 넘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자, 당신의 생각은?

‘시장근본주의’ 아닌 ‘시장급진주의’


미국 시카고대학의 법경제학자인 에릭 포스너와 마이크로소프트연구소 수석연구원인 글렌 웨일이 함께 쓴 <래디컬 마켓>은 불평등과 갈등으로 얼룩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현재 모습을 보다 공정한 세상으로 환골탈태시키자며 사회 제도의 근본적 재설계를 주장하는 매우 도발적인 내용의 책이다. 두 사람은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사회의 밑그림을 다시 짜는 최선의 방법은 결국 시장뿐이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한다. 단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이들은 재산권과 자유만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주변에 널린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와도, 정부의 개입과 규제에만 매달리는 철 지난 좌파의 행보와도 처음부터 선을 긋는다.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시장일수록 독점화돼 경쟁이 사라져 버렸거나, 아예 처음부터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특히 독점은 지은이들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수술하기 위해 정조준한 표적이다. 흔히 재화를 공급하는 주체가 하나뿐이라 통상적인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경우를 일러 독점이라 한다. 하지만 지은이들을 따라 시야를 조금 넓히면 ‘독점 문제’는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한 사회의 자원이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될 기회를 앗아갈뿐더러 길목을 막고 통행료(불로소득)를 뜯어가는 행위 모두 결국 그 뿌리는 독점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은이들은 영구적 소유권(재산권)을 인정하는 사적 소유 제도 역시 독점이라 일갈한다.

재산권에 자기평가 방식을 적용한 앞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이런 제도가 마련된 세상에서 특정 자산의 ‘소유자’는 임차인에 가깝다. 사회와 소유자가 소유권을 공동으로 나눠 갖는다고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공동소유 자기평가세’(common ownership self-assessment tax·COST) 아래에서는 현재처럼 ‘소유권’에 토대를 둔 낯익은 시장 질서가, ‘사용권’이 자유로이 거래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장 질서로 대체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가격을 정하지도 자원을 배분하지도 않으므로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와도 거리가 한참 멀다. 자원 배분의 핵심 역할은 시장, 특히 경매 방식의 시장이 맡는다. ‘더 많은 시장’을 통한 사회 구조 혁신이다. 지은이들이 자신들을 ‘시장급진주의’(market radicalism)라 자리매김하는 이유다.

래디컬 마켓의 원리는 정치 영역에도 스며들 수 있다. 1인1표제와 다수결 원칙을 따르는 현행 민주주의 제도는 결함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선호의 ‘강도’를 드러낼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은 1인1표제의 근본적 한계다. ‘어떤’ 후보자(주제)를 선택하느냐만이 중요할 뿐, ‘얼마나’ 선호하는지는 투표 결과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지은이들의 해법은 투표에도 래디컬 마켓을 도입하자는 것. 유권자들에게 해마다 일정 수의 ‘보이스크레디트’를 부여하되, 유권자들은 이를 그해 선거에서 사용할 수도, 다음 해 선거를 위해 ‘저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쟁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나 환경 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은 유권자라면, 여러 보이스크레디트를 사용해 자신의 강한 선호를 밝히는 식이다. 단 보이스크레디트를 표로 전환할 땐 반드시 ‘제곱투표’(Quadratic Voting·QV) 원칙을 따라야 한다. 100보이스크레디트는 10표, 16보이스크레디트는 4표의 효력만 지닌다.

래디컬 마켓 방식의 사회 구조 혁신이 불러올 기대효과는 매우 크다는 게 지은이들의 주장이다. 당장 세율 7%의 공동소유 자기평가세 하나만 도입하더라도 미국 국민소득의 20%만큼 세수를 늘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돈의 절반만으로도 미국 국민 1인당 연간 5300달러(약 600만원)씩 기본소득을 나눠줄 수 있다. 소득 분배 개선과 성장에 보탬이 되는 건 물론이다.

‘21세기 자유주의 선언’인가?


2018년 봄 <래디컬 마켓>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자 나라 밖에선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암호화폐 이더리움 창시자인 비탈릭 부테린이 극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런 반응은 구글·페이스북 등 거대 기술기업을 겨냥한 반(反)독점 정서가 최근 1~2년 사이 부쩍 강해진 상황과도 맥이 닿아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경쟁과 시장의 진정한 부활이야말로 ‘다음 자본주의 혁명’의 정수라며, 이 책의 메시지를 21세기 자유주의 선언과 연결짓기도 했다.

물론 <래디컬 마켓>에 담긴 주장을 당장 현실 사회 전체에 적용하기란 여러모로 무리다. 지은이들도 자신들의 논의가 단지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책 끝머리에 밝혔을 뿐이다. 그럼에도 작은 단위에서의 실험은 충분히 시도해봄 직하지 않을까. 공동체 자산인 주파수 경매나 국공유 부동산 매각 때 자기평가 세제를 도입한다거나, 혹은 지역 커뮤니티 단위에서 제곱투표를 적용해 본다거나.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와 시장 원리도 처음엔 한낱 급진적 주장에 불과했다. 다음의 두 문장은 까마득히 잊힌 옛 기억을 소환해준다. “사유 재산권은 독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윌리엄 스탠리 제본스) “토지에 대한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는 여지를 제한함으로써 자유경쟁의 긍정적 효과를 제한한다.”(레옹 왈라스) 눈치 챘겠지만, 두 사람 모두 사회사상사의 큰 줄기를 이룬 ‘한계혁명’의 주인공들이다. 주변의 시장근본주의자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주류 경제이론의 뼈대 말이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시장의 실패를 반드시 교정하겠다는 이른바 ‘개혁 정부’일수록 외려 이 책의 숨은(?) 미덕을 꼭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은이들의 급진적 주장을 받아들이느냐 여부와는 상관없이, <래디컬 마켓>의 정수는 저마다 복잡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낼 동기를 부여하는 ‘메커니즘 디자인’에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은 선의와 악의, 단지 둘만으로 가득 찬 게 아니다. 시쳇말로 ‘좋은 놈’과 ‘나쁜 놈’보다는 ‘이상한 놈’이 훨씬 많은 게 현실 세상 아니던가. 만일 당신이 지금 아름답고 멋진 정책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면, 정말 필요한 건 정교한 ‘제도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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