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어느 개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칼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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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근
송인근 2020년 7월7일 07:00
미국 연방대법관들. 출처=연방대법원
미국 연방대법관들. 출처=연방대법원

매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선 여름 휴지기를 앞두고 굵직굵직한 판결이 잇따라 나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미국 대법원은 지난달 15일, 일터에서 성소수자(LGBTQ)를 차별해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 이어 오바마 행정부가 시작한 불법이민자의 자녀를 미국에서 추방하지 못하게 막는 조치(DACA, 다카)를 트럼프 행정부가 철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마지막으로 임신중절을 어렵게 하는 루이지애나주의 주법이 임신중절을 허용한 대법원의 앞선 판례에 어긋나므로 주법을 폐지하라고 판결했다.

현재 9명의 미국 대법관 가운데 5명이 보수 성향, 4명이 진보 성향이다. 보수 우위 구도의 대법원임에도, 불과 열흘 사이에 세 번이나 연속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보수 진영에 실망을 안긴 것이다. 실망은 이내 분노로 이어졌다. “좌파 미디어의 비난과 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만들어낸 보수 우위 구도인데, 도대체 대법원이 어쩌다 이렇게 망가져 버렸냐”는 성토의 장이 열렸다.

세 건의 판결에서 가장 돋보인 인물은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다. 공화당 조시 W.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번 세 건의 판결에서 잇따라 진보 의견을 다수의견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바람에 보수 진영의 눈에 ‘배신자’, ‘역적’으로 찍혀버렸다.

특히 낙태를 어렵게 하는 주법을 폐지하라는 판결에서는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안에서 주법을 유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4년 전 비슷한 사안에 대해 주법을 폐지하라고 판결한 대법원 판례를 고려해 주법을 폐지하라는 의견에 선다”고 밝혔다. 4년 전 거의 비슷한 텍사스주의 법을 폐지하라고 대법원이 판결한 적이 있는데, 이때 로버츠 대법원장은 주법을 유지해도 좋다는 소수의견 편에 섰다. 본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4년 만에 대법원이 판례를 뒤엎는 건 대법원의 평판, 대법원 판례의 위상에 좋을 게 없다는 대법원장으로서의 판단이 앞선 것이다.

이른바 ‘문화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미국 보수 세력은 그동안 대법원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임기가 따로 없는 종신직인 대법관 자리에 보수적인 판사를 앉히면, 대법원은 자연히 보수적인 가치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판사들이 법조문과 판례조차 대단히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보수 진영의 바람과 어긋나는 판결이 계속 나왔다. 대법원은 엉겁결에 성소수자와 이민자,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지켜주는 기관이 돼버렸다.

원래 처음부터 완벽하게 모든 걸 갖춰 놓은 제도라는 건 없다. 문제가 생기면 고치고, 상황이 변하면 또 끊임없이 개선해나가는 작업을 병행하는 일은 제도를 잘 설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성난 보수 세력은 로버츠 대법원장 개인을 비난하기 전에 대법원이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여론의 변화를 읽었어야 했을 것이다.

블록체인과 스마트계약의 투명성을 맹신하는 분위기도 그래서 우려스럽다. 코드를 잘 짜놓는다고 블록체인이 알아서 투명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어떤 분야의 어떤 지점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했을 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합의가 없으면 암만 좋은 기술을 가져다 놓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제도란 원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늘 관리하고 가꿔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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